＜성녀＞에서는 공동 묘지 이장 작업을 하던 중 전혀 손상되지 않은 딸의 시신을 발견한 콜롬비아의 한 산간 마을 주민이 그 딸이 성인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까 하여 20여 년을 낯선 로마의 뒷골목을 헤매며 교황을 찾아다니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

＜대통령 각하, 즐거운 여행을＞에서는 전직 정치인의 비참한 말로를, ＜북풍＞은 산간 지방을 향해 부는 건조한 내륙풍의 광기와 이로 인해 벌어지는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 꿈을 꾸어 주고 돈을 받습니다 ＞에서는 비엔나에서 살아가는 한 콜롬비아 여인의 인생 역정과 비참한 최후를, ＜마리아 도스 쁘라세레스＞는 홀로 자신의 장례 준비를 하며 죽음을 기다리는 일흔여섯 살의 한 창녀를 그리고 있다.

또 ＜눈 위에 새긴 당신의 핏자국＞에서는 신혼 여행을 떠나는 아리따운 신부가 축하 꽃다발의 장미 가시에 찔려 죽는다는 어이없는 사건이 벌어지고, ＜가정 교사 미스 포르베스의 행복한 여름＞에서는 살인 사건과 같은 끔찍한 일이 벌어진다. 전화를 걸려던 한 여인의 삶의 뒤바뀜을 그린 ＜단지 전화를 걸려고 왔는데＞와 한 여인이 교황을 알현하기 위해 로마로 여행하던 중 여러 기이한 광경과 죽음을 보게 되는 ＜17명의 독살된 영국인들＞, 비행기에 함께 타게 된 미녀로 인한 상상을 얘기한 ＜잠자는 미녀와 비행기＞ 등이 실려 있다. 그 밖에도 ＜8월의 유령들＞, ＜불빛은 마치 물 같아＞가 있다.

* Gabriel Garcia Marquez, Doce cuentos peregrinos (Mondadori, 1992)

열두 가지, 순례, 이야기라고 한 이유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께스

그리고 이것은 아마 경망스럽다기보다는 순수한 정신적 고양 상태에 가까운 것일 게다. 게다가, 모든 단편들을 동시에, 그리고 완전한 자유로 이곳 저곳으로 건너뛰며 작업을 하면서 잇달은 시작들의 피곤함에서 나를 구해 낸 파노라마 같은 세계관을 얻었고, 부주의한 여분과 치명적 모순을 제거하도록 나를 도왔다. 항상 쓰기를 원했던 가장 최근의 단편 소설집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 책에 나오는 열두 가지의 이야기들은 지난 18년 동안에 쓰여진 것이다. [……] 1960년대 초에 첫 아이디어가 떠올랐는데, 그것은 바르셀로나에서 5년을 살고 난 후에 꾼 나 자신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생생한 꿈에서 비롯되었다. 나는 왠지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꿈을 내 정체성의 의식으로 해석했고, 유럽에 있는 라틴 아메리카 사람들에게 일어나는 이상한 일들에 관한 이야기를 쓰기 위한 좋은 출발점으로 생각했다. [……]

대략 2년 동안 떠오르는 주제들을 메모하였는데, 과연 이것들로 무엇을 해야 할지 아직 결정할 수가 없었다. [……]아주 세세한 것까지 해서 64가지 주제를 설정하게 되었고, 그것들을 쓰기만 하면 되는 상태에 이르렀다. [……]

처음에 쓴 두 이야기들은 ＜ 눈 위에 새긴 당신의 핏자국 ＞과 ＜ 가정 교사 미스 포르베스의 행복한 여름 ＞인데, 1976년에 썼고 여러 나라의 문학 부록지에 바로 실렸다. 이후 하루도 쉬지 않고 작업을 했으나 나의 장례식날 이야기였던 세 번째 이야기를 쓰던 도중에 나는 마치 장편 소설을 쓰는 것만큼이나 지쳐 있다는 걸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마찬가지 현상이 네 번째 이야기를 쓸 때도 일어났다. 너무 피곤해서 나는 그 이야기들을 끝낼 기운이 없었다. 단편을 쓰는 데 드는 노력은 바로 장편 소설 하나를 시작하는 것만큼이나 큰 것이다. [……]

거의 4년 동안이나 망각하고 있던 주제들이 내게 명예의 문제로 바뀌었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것들을 복원하려고 노력하면서, 그것들을 쓰는 것과 같은 아주 힘든 작업을 통해 30개의 주제를 재현했다. 그것들을 생각해 내는 노력만큼의 고통이 뒤따랐고, 필요 없다고 생각되는 것들을 가차없이 삭제해 버리니 18개의 이야기가 남았다. 이번에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그것들을 쓰려는 결심이 나를 고무시켰으나 열정이 식어 버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항상 신진 작가들에게 조언했던 것과는 달리, 나는 그것들을 쓰레기통에 던져 버리지 않고 다시 보관하였다. 혹시나 해서였다.

1979년 어느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 를 쓰기 시작할 무렵 나는 글 쓰는 습관을 책들 사이의 휴식기에 잃어버렸고, 번번이 다시 시작하기가 더 어렵게 되었다. 그래서 1980년 10월부터 1984년 3월까지 나는 여러 나라의 신문에 1주일에 한 번씩 칼럼을 쓰는 일에 매달렸다. 그 때 노트 메모에 대한 나의 집착은 계속해서 문학 장르의 문제로 이어졌고, 이 기간의 작업들은 단편 소설에 대한 내 생각을 바꾸어 놓았다. [……]

2년간의 간헐적인 작업을 거쳐 이 책에 나오는 열두 개의 단편을 완성했다. 쓰레기통을 왕복하는 끊임없는 순례가 이렇게 끝이 났다. 출판하기 위한 준비가 다 되었을 때 나는 회상의 정확함을 확인하고 싶어 바르셀로나, 제네바, 로마와 파리를 다시 들러 보는 빠른 여행을 시작했다. [……] 나는 여행에서 책을 완결 짓는 데 가장 필요했고, 오직 세월의 흐름만이 내게 줄 수 있었던 것을 발견했다. 바로 시간에 대한 투시를 말이다. [……]

행복한 여행에서 돌아와서, 어디에서 인생이 끝나고 어디에서 상상력이 시작되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는 것이 필요 없던 흥분된 8개월 동안 나는 처음부터 모든 단편들을 다시 썼다. 가끔씩 이야기하는 순수한 기쁨으로 글을 쓴다는 느낌을 가질 정도로 작품은 그 때부터 아주 잘 흘러 나왔다. [……] 첫 두 편을 제외한 모든 단편들은 동시에 끝마쳤고 각각의 것에는 그것을 쓰기 시작한 날짜가 들어가 있다. 이 책에 수록된 순서는 메모 노트에 있는 순서이다.

나는 어떤 짧은 이야기의 새로운 판은 먼젓번 것보다 더 낫다고 항상 믿어 왔다. 그렇다면 어느 것이 최종판이라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는가? 이것은 직업상의 비밀인데, 이성의 법칙에 따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쯤 수프가 된다는 것을 요리사가 알 듯이 본능의 마력에 따른 것이다. 어쨌든 후회의 두려움 때문에 나의 작품들 중 어떤 것도 다시 읽지 않았듯이, 의구심으로 나는 다시 그것들을 읽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들을 읽는 사람은 그들과 함께 무엇을 할 것인지 알게 될 것이다. 다행히도 이 이방의 순례자들에게 있어 휴지를 버리는 소쿠리로 돌아가는 것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쁨 같은 것이리라.